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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루터기
실명이란 무엇인가 — ‘진짜 이름’이라는 환상 본문
우리 사회는 유독 ‘실명’이라는 단어에 집착하는 것 같다. 마치 어떤 이름은 ‘진짜’고, 나머지는 ‘가짜’인 것처럼 느끼게 만드는 말. 하지만 정말 그런 이름의 위계가 존재할까?
어릴 적 듣던 동요 중 하나가 문득 떠오른다. “이름은 하나인데 별명은 여러 개~” 귀엽게 부르던 이 노랫말은 오히려 중요한 진실을 담고 있다. 사람을 부르는 이름은 단 하나로 고정되어 있지 않다. 가족이 부르는 이름, 친구들이 부르는 이름, 회사에서 불리는 호칭, 심지어는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사용하는 닉네임까지 — 모두 ‘그 사람’을 지칭하는 이름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어떤 이름은 ‘실명’이라 불리며, 다른 이름은 그렇지 못할까?
사람의 이름은 고정된 본질이 아니다. 그 사람을 둘러싼 맥락에 따라, 관계에 따라, 그리고 쓰임에 따라 변주되는 것이다. 영어권에서도 이런 유연함은 쉽게 볼 수 있다. Donald는 Don이 되기도 하고, William은 Bill로 불린다. 어떤 이는 태어날 때부터 Don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서류를 작성하고 살아가며, 그의 여권에만 Donald라고 적혀 있을 뿐이다. 이럴 때 도대체 어느 쪽이 진짜 이름이고, 어느 쪽이 가짜인가?
이런 점에서 ‘실명’이라는 개념은 근본적으로 모순적인 측면이 있다. ‘실명’이라는 말은 진실된 이름, 혹은 원래의 이름을 의미하지만, 실상 그것은 국가나 제도에 의해 부여된 ‘법적 명칭’에 불과하다. 따라서 우리가 흔히 말하는 ‘실명’은 ‘법정명(法定名)’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지 않을까 싶다. 그 이름이 개인의 정체성을 가장 잘 나타내는 ‘실제의 이름’이라는 보장은 없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두음법칙에 대한 논의와 나란히 놓고 보면 흥미로운 공통점이 드러난다. 우리는 국가가 공인한 언어 규범, 이름 규정, 신원 제도 속에서 살아간다. 이름도 예외가 아니다. 한국 사회에서 ‘공인된 것’에 대한 집착은 꽤 뿌리 깊다. 주민등록증에 적힌 이름이 ‘진짜’ 이름이고, 주민등록번호가 ‘유일무이한 정체성’이라고 믿는 사회. 이런 믿음은 종종 개인의 다양한 정체성과 표현의 자유를 억누른다.
공공기관의 민원 창구에서, 은행의 계좌 개설 절차에서, 심지어 학교의 출석부에서도 ‘실명 사용’이 강조된다. 인터넷 실명제 같은 제도도 한때는 표현의 자유보다 ‘신원 확인’을 우선시했던 한국 사회의 분위기를 반영한다. 여기서 ‘실명’이란 결국 국가가 인증한 이름이고, 이는 국가의 권위가 개인의 정체성을 규정하고 통제하는 한 방식일 뿐이다.
하지만 한 사람은 단일한 이름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다양한 이름들 — 별명, 예명, 닉네임, 필명 등 — 속에서 우리는 각기 다른 사회적 관계를 살아가며, 자신을 드러내기도 숨기기도 한다. 어떤 이름은 어린 시절의 기억을 담고 있고, 어떤 이름은 새로운 정체성을 위한 선택이다. 이들 모두가 그 사람의 일부다.
‘실명’이라는 이름의 위계를 해체하려면, 이름은 관계의 산물이며 맥락 속에서 유동적인 것임을 인정해야 한다. 이름은 지정된 코드가 아니라, 살아 있는 언어의 일부다. 그리고 언어는 언제나 권력과 맞닿아 있다.
실명을 고집하는 사회는, 사실 ‘공인된 것’에 대한 불안에서 출발하는지도 모른다. 국가가 인정한 것만이 진짜라고 여기는 사고방식은, 그만큼 비공식적이고 사적인 것들을 불안정하고 위험하게 여긴다는 뜻이다. 이는 두음법칙 같은 언어 규범이 사투리를 배제하고, 실명이 닉네임을 억압하는 구조와 닮아 있다.
이러한 집착은 이름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우리가 살아가는 정체성의 영역 전반에 걸쳐 스며 있다. 예컨대, 태어날 때 부여받은 ‘법적 성별’을 ‘진짜 성별’로 간주하고, 그 이외의 정체성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회적 태도도 같은 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트랜스젠더, 논바이너리, 성별 스펙트럼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시선은 결국 ‘국가가 공인한 성별만이 진짜’라는 믿음에서 비롯된다. 이러한 믿음은 사람의 존재 자체를 국가의 기준에 종속시키려는 폭력과도 다름없다.
결국,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것은 단순히 이름을 어떻게 부를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누가 나를 규정할 수 있는가’라는 훨씬 더 근본적인 질문이다. 이름이든 성별이든, 그 정체성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나 자신’이어야 하지 않을까?